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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살, 다시 부르는 노래Critic & Memory 2022. 11. 20. 05:47
김정혜 큐레이터
천정에 매달려 있는, 이미 생명이 사라진 검은 열매들을 따라 경사진 길을 내려가면 무심한 조명이 비치는 하얀 벽과 마주하게 된다. 자우녕의 《최선의 관계》전은 소실을 지나 소멸과 맞닥뜨리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관계’, 더구나 최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에 모든 관계가 끝나버린(것이 분명할),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길잡이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의 질문을 툭 던져 놓는다. 이어지는 공간에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포르투갈의 메세자나, 일본의 오키나와, 한국의 우도를 다니며 수집한 낯 선 호기심들이 그 만의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놓여 있다. 그에게 수집은 목적도 의미도 아니다. 우연한 호기심과 가벼운 시선에서 요청된 행위들이다. 자우녕의 행위는 시작에 집중하고 과정을 채집할 뿐 더 이상의 강요도 의도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작된 낯 선 풍경의 이야기가 무심히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우도 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있던 2020년 전시 《섬은 상징이 되고 상징은 섬이 된다》에서 섬의 바람과 비, 폭풍의 징후로 인해 나타나고 사라지는 삶의 모습에 마음을 두었다고 이미 고백했다. 그 마음을 이어 이번에는 세 개의 섬 이야기를 전한다. 신경과 전문의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의 『색맹의 섬』을 접하고 섬의 특이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유하게 되면서 이번 전시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생명이 의존과 파괴의 과정을 지나 공생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현상을 포착하고 그것으로부터 자연과 자연, 자연과 인공, 인공과 인간, 인공과 개인과의 관계 설정을 시도한다고 전시의 글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시도가 연구자도 활동가도 아닌 여행자 A의 시선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하얀 콘크리트 벽에 파란 대문이 줄지어 있는 조용한 마을 메세자나(Messejana), 태풍이 지난 뒤 몇 달째 닫혀있는 카페의 야자수, 짓다 만 찜질방,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개들로 기억되는 우도(U-do), 세찬 바람으로 모자가 날아가고 여행 가방까지 놓쳐버린 오키나와(Okinawa)에서의 기억 같은 것들로 전시장을 안내하는 문구들이 그러하다. 우리는 여행자 A를 따라 세 개의 섬을 여행하며 죽음, 침입, 치환, 변태(Metamorphosis)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기이하고 낯 선 우리를 만나게 된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최선의 관계에 대한 첫 질문을 시작했던 검은 열매는 떨어진 모과로 포르투갈의 남부 지방, 원시가 원시로 남아 있는 곳, 바로 메세자나에서의 시간의 증거이다. 작가는 달큼하면서도 시큼한 진한 향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그 열매가 생명이 소실되어 그 의미에서 탈각된 순간의 생경함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 순간 자우녕은 발견된 대상에 감정이나 의도를 개입시키거나 상태를 훼손하지 않고 엄격히 관찰자의 위치를 유지한다. 행위가 일어나는 과정에서조차도 존재 안으로 무례하게 침입하지 않는다. 작품명을 <모과>가 아닌 <모과나무에서 떨어진 것들>이라고 한다거나 <우도 담수장의 성적서>, <시사가 놓여있는 장소>에서도 나타나듯이 대상에 대한 사실들을 기록하며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여행자 A의 시선과도 닿아있다.
<가라앉는 섬>은 우도에서의 일화를 기록한 것으로 작가의 시선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2019년부터 우도에 머물던 작가는 어느 날 마을회관에서 열렸던 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3대가 먹고 살 수 있다고 하던 어느 자본가에 의해 파괴된 지역, 그 지역을 둘러싼 이해관계들,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에서 획득한 것들로 살아가는 사람과 그것에 대항하고 파괴할지라도 더 많은 부를 갖는 이기를 선택할 것을 종용하는 사람들의 대립 속에 버려지고 외면되는 환경. 그것이 다시 우리의 삶을 더욱 척박하게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순환의 관계에 대해 담담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푸른 영상 앞으로 플라스틱의 여러 개의 수조가 놓여 있고 그 안에 우도에서 채집한 모래, 돌, 수초들이 담겨 있다. 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작은 섬들은 수조 안에서 조용하다. 짧은 시간 동안은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않는다. 영상에서는 해녀들의 목소리가 분주하게 들린다. <가라앉는 섬>의 작품명은 우도의 현재에 대한 전언(傳言)이다. 전시장 한쪽에 커다란 테이블 위로 석고 덩어리들이 놓인 <시사가 놓여 있는 장소> 역시 당시 작가가 목격한 오키나와의 상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일본도 대만도 아닌 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오키나와는 액운이나 화재를 극복하기 위해 집집마다 마을마다 시사를 만들어 세워놓는다고 한다. 그런데 극복하려고 만든 그것으로 인해 더 큰 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생기고 그럼에도 계속 사람들은 그것을 더 만들어 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대해 전한다.
탈각(脫殼) 된 몸이 사는 법
메세자나에서 수집한 올리브나무 숯, <Cast-off>는 올리브나무가 타고 남은 흔적이다. 작가는 그것에서 탈각된 또 다른 형태인 ‘사리’를 연상한다. 사전적 의미로 탈각은 불필요한 것(껍질)을 떨어내고 진정한 생으로 나아가는 시작을 말한다. 그런데 자우녕은 생명이 사라진 형태와 탈각을 연결한다. 여기가 삶을, 혹은 죽음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작가는 삶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단선적인 현상만을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들이 변신을 거듭하면서 만들어내는 억겁(億劫)의 시간을 기대한다. 이런 시선은 <넝쿨나무식물>에도 담겨있다. 나무에 넝쿨이 감겨 있는 건지 넝쿨 사이로 나무가 들어선 건지 주종(主從)을 알 수 없는 형태는 무엇에 붙어 그 무엇을 침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 그러나 그것이 적당한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면 서로 살게 할 수도 있는 그것으로부터 자연과 인간, 자본과 인간, 나아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넝쿨나무식물> 처럼 넝쿨인지 식물인지 나무인지 모르겠지만 하나의 존재로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이 뒤엉킨 것조차 혼돈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한 시선은 푸른 계열의 색들이 교차되어 보이는 <색각이상>에서 어느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 현상을 의도하면서 무엇도 아니면서 무엇일 수도 있는 경계에 대해 유머러스하면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1막과 2막 사이
작가는 전시장이 1막과 2막 사이의 세트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연극이 시작하고 막과 막 사이의 시간, 무대 위는 암전 되고 아무 기운도 느낄 수 없다. 그러다 불이 켜지면 관객은 1막과는 달라진 무대를 보게 된다. 알 수 없는 사이 그곳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흔적을 수집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역사를 찾고 책을 읽는다.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두리번거린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의 순간이다. 상태가 달라지는 순간, 경계가 되는 지점에서 자우녕은 질문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때를 찾아 주저하지 않고 들어간다. 작가는 관객들에게 지난 4년간의 선택의 조각들을 건넨다. 막과 막 사이처럼 캄캄하여 도저히 알 수 없는 시간과 같은 질문을 위해 고립과 소외의 상징, 강하게 소용돌이치는 원시의 징후들, 자본의 욕망과 태고의 관성이 혼재하는 섬의 조각들을 주워 모아 놓고는 하나의 질문조차 완결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우녕 작가는 질문을 완성하지 않고 완성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전할 뿐이다.
<최선의 관계>에서 우리는 최선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최선의 관계가 가능한 자리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 나였으나 내가 아닌 무엇의 사이. 나를 벗고 다시 만나게 되는 무엇. 작가가 고집스럽게 찾고 자리하는 그곳에서라면 혹시 어느 정도 상처와 아픔이 있을지라도 제법 최선의 관계가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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